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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지로버 일렉트릭 (디자인, 플랫폼, 소프트웨어)

항기의계절 2026. 9. 3. 14:40

목차


    고속도로에서 레인지로버 한 대가 옆 차선을 지나칠 때, 저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있어 보이는' 차. 그 레인지로버가 드디어 전기차로 나왔습니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 전 세계 대기자만 8만 명에 달할 정도로 기대를 받아온 차인데, 하드웨어는 거의 만점에 가깝지만 소프트웨어에서는 명확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직접 스펙과 구조를 뜯어보며 느낀 걸 솔직하게 정리했습니다.

    디자인: 건드리지 않은 게 오히려 정답이었습니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바뀐 게 없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핵심이더라고요.

    랜드로버가 공식 발표에서 밝힌 외관 변경점은 딱 네 가지입니다. 공기역학적으로 최적화된 그릴, 새로운 휠 디자인, 충전구 추가, 배기구 삭제. 이게 끝입니다. 나머지는 현행 5세대 레인지로버 내연기관 모델과 구분이 되지 않는 수준이죠.

    처음엔 '좀 성의 없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습니다. 그런데 메르세데스-벤츠 EQ 시리즈를 떠올리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벤츠는 공기저항계수(Cd) 0.20을 달성하겠다며 차를 물방울 모양으로 만들었다가 "이게 무슨 벤츠냐"라는 반응만 얻고 결국 EQ 브랜드 자체를 폐기했습니다. 여기서 공기저항계수(Cd)란 차량이 공기를 가르며 달릴 때 받는 저항의 크기를 나타내는 수치로, 낮을수록 연비와 주행 효율이 좋아집니다. 벤츠는 이 숫자 하나에 집착하다 브랜드 정체성을 잃었죠.

    페라리도 최근에 첫 전기차 루체를 내놓으면서 디자인 논란에 시달렸습니다. 제가 직접 여러 사례를 비교해보니 브랜드 헤리티지가 강한 회사일수록 전기차라는 이유로 새 디자인 언어를 억지로 적용하면 독이 된다는 게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레인지로버는 그 함정을 처음부터 피해갔습니다.

    실내도 마찬가지입니다. 13.1인치 중앙 디스플레이와 12.3인치 디지털 계기판, 전체 레이아웃과 소재·색상 구성까지 기존 모델과 동일합니다. 고속도로에서 제 시선을 붙잡았던 그 디자인이 전기차로도 그대로 살아있다는 점, 이건 구매욕을 유지시키는 데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약: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은 기존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이는 EQ·루체 사례에서 증명된 '헤리티지 훼손 실패'를 피한 올바른 선택입니다.

     

    플랫폼과 배터리: 혼용 전략의 영리함과 한계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은 MLA 플렉스(Modular Longitudinal Architecture) 플랫폼을 사용합니다. 쉽게 말해 가솔린·디젤·마일드 하이브리드·플러그인 하이브리드·순수 전기차를 하나의 공장 라인에서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혼용 플랫폼입니다. BMW의 CLAR 플랫폼과 비슷한 개념이죠.

    이 전략이 왜 지금 시점에 영리하냐면, 전기차 수요가 지역마다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이미 신차 판매의 절반 이상이 전기차이고 유럽도 20% 이상을 기록하고 있지만, 레인지로버의 핵심 시장인 미국에서는 올해 전기차 판매량이 20% 넘게 역성장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세액공제 종료와 하이브리드 선호 기조가 맞물린 결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의 라인으로 파워트레인 비율만 조정할 수 있다는 건 제조사 입장에서 굉장한 유연성입니다. 저도 이 전략은 꽤 잘 짜여졌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혼용 플랫폼의 구조적 한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세로 배치 엔진 자리, 가운데 변속기 터널, 프로펠러 샤프트 경로가 이미 잡혀 있는 구조에 배터리를 끼워 넣어야 하다 보니, 배터리를 차 바닥에 평평하게 깔아 최대 용량을 확보하는 스케이트보드 아키텍처 방식을 쓰기 어렵습니다. 스케이트보드 아키텍처란 전기차 전용 플랫폼에서 배터리 팩을 차체 바닥 전체에 납작하게 배치하는 구조로, 공간 효율과 무게 중심 확보에 유리합니다.

    실제로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의 배터리 용량은 118.5kWh NCM 배터리인데, 한 급 아래인 BMW iX5가 144kWh를 탑재하고 비슷한 차급의 제네시스 GV90이 123kWh를 탑재한 것과 비교하면 차급 대비 대용량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열 센터 터널이 여전히 솟아 있는 것도 이 혼용 구조 때문입니다. 뒷좌석이 완전히 평평하지 않다는 점은 제 경험상 장거리 탑승자에게 분명히 체감되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배터리와 충전 기술에서는 예상 밖의 성과가 나왔습니다. 랜드로버는 영하 40도에서 영상 50도까지 견디고 90cm 수심 도강이 가능한 조건을 만족하는 배터리 셀을 외부에서 그냥 사다 쓰지 못하고 직접 설계했습니다. 관련 특허만 300건 이상이라고 합니다. 또한 혼용 플랫폼임에도 800V 고전압 시스템을 적용한 점은 생각보다 대단합니다. 800V 고전압 시스템이란 기존 400V 대비 전압을 두 배로 높여 같은 충전 출력에서 전류를 절반만 흘려도 되게 하는 방식으로, 충전 케이블 발열이 줄고 무게와 충전 시간이 동시에 개선됩니다. BMW iX 같은 혼용 플랫폼 차들이 아직 400V에 머물러 있는 것과 비교하면 레인지로버가 여기서 한발 앞선 셈입니다. 10%에서 80%까지 충전 시간은 22분으로 현대차 800V 전기차들과 동급 수준입니다.

    • 배터리 용량: 118.5kWh NCM, 각형 셀 344개 더블 스택 구조
    • 충전 속도: 350kW 급속 충전기 기준 10→80% 22분 (800V 시스템 적용)
    • 주행 가능 거리: WLTP 기준 약 600km, 국내 환경부 기준 약 450km 예상
    • 배터리 셀 공급: 초기 물량 AESC(중국 인비전 그룹 산하), 장기 물량 Agratas(타타 그룹 배터리 자회사)
    • 자체 개발 히트 펌프 '서머시스트' 적용 — 난방 에너지 40% 절감, 주행 거리 40km 추가 확보

    배터리 셀 공급사와 관련해서 솔직히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초기 물량에 들어가는 AESC는 중국 인비전 그룹 산하 브랜드이고, 이후 물량을 담당할 Agratas는 인도 타타 그룹의 배터리 자회사입니다. 재규어 랜드로버 자체도 타타 그룹 소유이니 같은 계열사인 셈이죠. 국내 소비자 정서상 선호하는 셀 브랜드가 아니라는 점은 구매 결정에서 고민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약: MLA 플렉스 혼용 플랫폼은 수요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영리한 전략이지만, 배터리 용량과 실내 공간 효율에서 전기차 전용 플랫폼 대비 구조적 한계가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출시 첫날부터 한 세대가 밀린 부분

    하드웨어 완성도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제가 가장 아쉽게 느끼는 부분이 바로 소프트웨어입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입니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에는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해주는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차선 중앙 유지 정도의 기본 ADAS(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만 탑재됩니다. 여기서 ADAS란 카메라·레이더 센서를 활용해 차량이 스스로 일부 운전 상황을 보조해주는 기술의 총칭으로, 레벨이 높아질수록 운전자 개입이 줄어듭니다. 레벨 2플러스 수준의 고속도로 자율주행 기능은 이번 모델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재규어 랜드로버가 이미 엔비디아와 풀스택 협력을 맺고 차세대 EMA(Electric Modular Architecture) 플랫폼 위에 레벨 2플러스 시스템을 탑재할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EMA 플랫폼이란 처음부터 전기차만을 위해 설계한 전용 플랫폼으로, 고성능 중앙 컴퓨터 몇 개로 차량 전체 기능을 제어하는 차세대 전기·전자 아키텍처가 적용됩니다. 초당 256조 회 연산을 수행하는 엔비디아 오린 칩과 카메라·레이더 구성, AI 시뮬레이션 플랫폼 옴니버스를 활용하는 구조인데, 이는 현대차그룹이 엔비디아와 협력하는 방식과 거의 유사합니다(출처: NVIDIA Automotive).

    이 레벨 2플러스 시스템은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이 아니라 그 다음 모델, 즉 EMA 플랫폼 기반의 완전히 새로운 레인지로버 GT부터 적용됩니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의 MLA 플렉스 하드웨어 구성으로는 추후 업데이트로 따라가기도 어렵습니다. 차 출시가 2년 밀린 게 이렇게 치명적입니다. 2024년에 예정대로 나왔다면 이런 비교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요.

    두 번째는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Pivi Pro입니다. LG전자와 공동 개발해 블랙베리 QNX 하이퍼바이저 플랫폼 위에 올린 이 시스템은 2020년 CES에서 UI 고급스러움과 안정성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출처: CES 공식 사이트). 당시 랜드로버 차들이 느리고 버벅거리는 인포테인먼트로 악명이 높았던 터라 Pivi Pro는 분명 혁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앱스토어가 없고, 서드파티 앱을 다운받아 개인화할 수 없으며, 생성형 AI 어시스턴트도 없습니다. 테슬라처럼 OTA(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기능이 계속 진화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쟁사들이 안드로이드 오토모티브 OS를 받아들이며 앱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Pivi Pro는 이제 조금 낡은 시스템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레인지로버 일렉트릭 대기자 중 70%가 브랜드 신규 고객이고 20%가 이미 전기차를 경험한 소비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아쉬움은 실제 구매 결정에서 적지 않은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약: 레벨 2플러스 자율주행 미적용과 Pivi Pro의 앱 생태계 부재는 하드웨어 완성도와 대비되는 명확한 소프트웨어 세대 격차이며, 이는 출시 지연 2년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레인지로버 일렉트릭 국내 출시 가격은 얼마나 될까요?

    A. 현행 레인지로버 가솔린 P530 오토바이오그래피가 약 2억 4,880만 원, 하이브리드 모델이 약 2억 4,540만 원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기본 트림은 2억 중반대에서 출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롱휠베이스 SV 상위 트림은 3억 원을 넘어 4억 원에 근접할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국내 가격은 공식 런칭 시점에 확정됩니다.

     

    Q. 배터리를 왜 직접 설계했나요? 삼성SDI나 LG엔솔 셀을 쓰면 안 됐나요?

    A. 재규어 랜드로버가 탑기어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영하 40도에서 영상 50도, 수심 90cm 도강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배터리 셀을 외부에서 구매해 쓰는 게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어떤 셀 제조사도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제품을 만들지 못했던 것이죠. 결국 셀 설계와 열관리 시스템(TMS)을 자체 개발하기로 결정했고, 이것이 출시가 약 1년 늦어진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

     

    Q. 전기차인데 도강 능력이 내연기관과 왜 똑같이 90cm인가요?

    A. 직관적으로는 흡기구와 배기구가 없으니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수심 90cm를 넘어가면 차체가 부력을 받아 실제로 뜨기 시작합니다. 바퀴가 지면에서 떠버리면 구동력 자체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방수 성능의 한계가 아니라 물리적인 부력 한계가 도강 깊이를 결정합니다. 즉, 배터리·모터의 방수 처리는 충분히 돼 있지만 90cm 이상은 애초에 차가 뜨는 문제입니다.

     

    Q. 레벨 2플러스 자율주행은 나중에 업데이트로 추가될 수 있나요?

    A. 현재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의 MLA 플렉스 플랫폼 기반 하드웨어 구성으로는 레벨 2플러스 시스템으로의 업데이트가 어렵다는 게 중론입니다. 레벨 2플러스 시스템은 엔비디아 오린 칩, 고성능 중앙 컴퓨터, 이에 맞는 전기·전자 아키텍처가 처음부터 함께 설계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능은 차세대 EMA 플랫폼 기반의 레인지로버 GT부터 적용될 예정입니다.

     

    결론

    레인지로버 일렉트릭은 지난 100년의 자동차 기준으로 보면 거의 만점짜리 차입니다. 극한 환경을 버티는 배터리를 직접 설계했고, 혼용 플랫폼에 800V 시스템을 구겨 넣었으며, 제로백 4.5초와 90cm 도강을 동시에 달성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지나가는 레인지로버를 보며 저도 모르게 시선을 뺏겼던 그 디자인을 건드리지 않은 것도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다만 이제 시장은 소프트웨어로 차를 평가합니다. 레벨 2플러스 자율주행이 없고 앱 생태계도 없는 이 차는, 출시 첫날부터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이미 한 세대 뒤처진 상태로 등장한 셈입니다. 2년의 출시 지연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이 차 한 대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럭셔리 SUV의 드라이빙 경험과 존재감 자체를 우선시하는 분이라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선택지입니다. 반면 소프트웨어 완성도와 자율주행을 함께 원한다면, 차세대 EMA 플랫폼이 적용되는 레인지로버 GT를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도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07TZ_I4L4PI&t=75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