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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속도로에서 벤틀리를 마주칠 때마다 저는 속도를 늦추게 됩니다. 그 원형 헤드램프 네 개가 뿜어내는 묵직한 존재감은 10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우아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3일, 벤틀리가 브랜드 최초의 전기차 토르칼을 공개하는 순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정직하게 왔습니다.

벤틀리 토르칼 : 벤틀리다운 디자인이 사라졌다는 실망감
토르칼의 전면부를 처음 봤을 때, 제가 직접 봤는데 머릿속에서 "이게 벤틀리야?"라는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습니다. 기존 벤틀리를 상징하던 둥근 헤드램프 네 개가 사라지고, 얇은 직선 DRL(주간주행등) 네 줄로 대체됐습니다. 여기서 DRL이란 주간 주행 시 차량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보조 조명으로, 최근 전기차 브랜드들이 전면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직선 네 줄이 벤틀리만의 언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 디자인 방향은 BMW가 7세대 7시리즈를 2022년에 공개하며 이미 먼저 걸어간 길입니다. BMW는 당시 헤리티지 재해석이라는 명분 아래 직선형 램프와 크리스탈 장식을 결합했고, 벤틀리 토르칼의 플로팅 다이아몬드 그릴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읽힙니다. 플로팅 다이아몬드 그릴이란 그릴 내부에 다이아몬드 형태의 장식 조각을 수작업으로 부착하고, 잠금 해제 시 조명이 서서히 점등되는 벤틀리의 신규 디자인 요소를 가리킵니다. 화려하기는 한데, 벤틀리 공식 유튜브 채널 댓글에는 "중국차 같다", "새로운 BYD 바이브다" 같은 반응이 대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제 경험상, 럭셔리 브랜드의 디자인이 힘을 갖는 건 "억지로 보여주려 하지 않을 때"입니다. 기존 벤틀리는 감추고 싶어도 감춰지지 않는 럭셔리였습니다. 그런데 토르칼은 나 럭셔리야, 좀 봐봐라고 외치는 것처럼 읽혔습니다. 이 차가 역시 벤틀리답다고 느끼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첫인상에서 브랜드 헤리티지가 얼마나 취약하게 다뤄졌는지를 먼저 읽게 됩니다.
실내로 들어가면 벤틀리 전통의 오르간 스톱(Organ Stop), 즉 파이프 오르간의 음색 전환 손잡이에서 영감을 받아 송풍구 방향을 조절하던 아날로그 레버가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를 이제는 터치 디스플레이가 대신합니다. 롤스로이스나 벤틀리처럼 물리적 조작계에 집착하는 것은 단순한 복고 취향이 아니라 촉각 경험을 통한 브랜드 감성의 일부였습니다. 그걸 없앤 자리에 남은 건 카이엔 일렉트릭과 거의 동일한 화면 구성입니다.
- 기존 원형 헤드램프 → 직선형 DRL 4줄로 전면 아이덴티티 교체
- 플로팅 다이아몬드 그릴 수작업 장식: 화려하지만 해외 반응은 "중국차 유사" 다수
- 오르간 스톱 폐지 → 터치 디스플레이 조작으로 대체, 벤틀리 촉각 감성 약화
- 중앙 OLED 디스플레이·계기판·HUD 모두 포르쉐 카이엔 일렉트릭과 공유
포르쉐와의 플랫폼 공유와 벤틀리의 정체성: 1억 5천만 원의 가치가 있는가
이전에 볼보가 전기차를 내연기관 모델보다 더 저렴하게 내놓았을 때 꽤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벤틀리 토르칼도 영국 기준 173,300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3억 1,200만 원으로 현재 벤틀리 라인업 중 가장 저렴한 모델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 가격표를 들여다보는 순간, 저는 자연스럽게 포르쉐 카이엔 일렉트릭과 비교하게 됐습니다.
토르칼의 기반이 되는 플랫폼은 PPE(Premium Platform Electric)입니다. 여기서 PPE란 아우디와 포르쉐가 공동 개발한 대형 전기차 전용 플랫폼으로, 800V 고전압 시스템과 400kW급 초급속 충전을 지원하는 것이 핵심 특징입니다. 이 플랫폼은 포르쉐 마칸 일렉트릭, 카이엔 일렉트릭, 아우디 Q6 e-tron, A6 e-tron 등과 공유됩니다(출처: 포르쉐 코리아 공식 사이트).
공유 범위가 어느 정도냐 하면, 토르칼과 카이엔 일렉트릭의 휠베이스가 3,030mm로 완전히 동일합니다. 전체 길이 차이는 불과 2mm입니다. 배터리는 113kWh 800V 시스템, 배터리 셀 개수까지 192개로 똑같습니다. 후륜 모터는 카이엔 일렉트릭 것, 전륜 모터는 아우디 Q6 e-tron 것을 가져왔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제가 직접 수치들을 나열해보니 이건 파생 모델이 아니라 거의 뱃지 엔지니어링(Badge Engineering)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뱃지 엔지니어링이란 동일한 기반의 차량에 다른 브랜드 로고와 외장 디자인만 얹어 새 모델로 판매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격 차이는 얼마나 될까요. 포르쉐 카이엔 일렉트릭은 기본형이 1억 4,370만 원에서 시작하고, 토르칼에 준하는 사양으로 옵션을 구성해도 1억 9천만 원 안팎이면 됩니다(출처: 벤틀리 모터스 공식 사이트). 토르칼과 비교하면 1억 2천만 원 이상 차이가 납니다. 벤틀리 로고, 수작업 가죽 인테리어, 가상 주행 사운드인 벤틀리 다이나믹 심포니(Bentley Dynamic Symphony)에 그 금액을 기꺼이 얹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저는 솔직히 "굳이?"라는 대답이 먼저 나왔습니다.
내연기관 시대의 벤틀리는 달랐습니다. W12 엔진은 실린더 12개짜리 6리터 트윈터보 유닛으로, 엔진 하나를 조립하는 데 7시간이 걸리고 부품 수만 2,600개였습니다. 6.75리터 V8 엔진은 1959년 첫 등장 이후 60년 넘게 이어진 근본 있는 유산이었습니다. 이 두 엔진은 성능, 승차감, 수작업 소재, 사운드라는 벤틀리의 네 가지 핵심 가치를 단 하나의 부품으로 모두 충족시켰습니다. 토르칼에는 그 역할을 대신할 하드웨어가 없습니다. 풀 액티브 서스펜션(Full Active Suspension), 즉 스태빌라이저 바 없이 바퀴마다 전동 유압 펌프를 달아 차체를 개별 제어하는 기술도 포르쉐 액티브 라이드(PAR) 기술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벤틀리 토르칼 가격이 기존 벤틀리보다 저렴한 이유가 뭔가요?
A. 영국 기준 173,300파운드(약 3억 1,200만 원)로, 현재 벤틀리 라인업에서 가장 저렴한 모델로 출시됐습니다. PPE 플랫폼을 포르쉐, 아우디와 공유하며 개발 비용을 절감한 것이 주된 이유로 보입니다. 전략적으로 전기차 진입 장벽을 낮추려는 의도도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저는 그보다 폭스바겐 그룹 전체의 비용 절감 기조가 반영된 결과라는 판단에 더 가깝습니다.
Q. 포르쉐 카이엔 일렉트릭과 토르칼, 실제로 얼마나 비슷한가요?
A. 휠베이스 3,030mm로 완전히 동일하고 전체 길이 차이는 2mm에 불과합니다. 배터리 용량(113kWh), 셀 개수(192개), 충전 시스템(800V/400kW)까지 수치가 일치합니다. 카이엔 일렉트릭이 기술적으로 더 정직한 선택일 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체감 경험에서도 그 차이가 상당히 좁혀질 것으로 봅니다.
Q. 벤틀리 토르칼의 주행 가능 거리는 어떻게 되나요?
A. 유럽 WLTP(복합 연비 측정 방식) 기준으로 완충 시 600km 주행이 가능하다고 발표됐습니다. 국내 환경부 기준으로는 통상 WLTP 대비 70~80% 수준이 나오므로 400km 중반대를 예상하시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급속 충전은 최대 400kW를 지원해 10%에서 80%까지 20분 이내로 채울 수 있다고 합니다.
Q. 벤틀리 다이나믹 심포니 사운드가 실제로 괜찮은가요?
A. 벤틀리 다이나믹 심포니는 드럼, 비올라, 베이스 기타를 실제 연주자들이 연주한 것을 녹음해, 가속 페달 입력과 속도에 맞춰 재생되는 가상 주행 사운드입니다. 역사적인 6.75리터 V8 엔진의 리듬을 기반으로 녹음했다고 하는데, 공개된 영상에서 들어보니 감성은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W12나 V8 엔진 배기음의 물리적 감동을 대체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결론
벤틀리 토르칼이 나쁜 차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포르쉐가 만든 최고 수준의 PPE 플랫폼 위에, 벤틀리 특유의 가죽 장인 마감과 수작업 인테리어를 얹은 결과물입니다. 폭스바겐 그룹 전체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시기에 첫 전기차를 세상에 내놓은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벤틀리는 단순히 좋은 차를 파는 브랜드가 아닙니다. 제가 고속도로에서 벤틀리를 볼 때마다 느꼈던 그 설명하기 어려운 꿈 같은 감각, 그게 벤틀리가 팔아온 것이었습니다. 토르칼은 지금 합리를 팔고 있습니다. W12와 V8 엔진이 사라진 자리를 채울 벤틀리만의 새로운 정체성을 아직 찾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저는 토르칼보다 카이엔 일렉트릭을 고르겠습니다. 그리고 벤틀리가 다음 전기차에서는 그 1억 원 이상의 가격 차이를 납득시킬 무언가를 들고 나오기를 기다려볼 생각입니다.